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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세상으로 나온 이유

- 대중문화의 흐름에서 바라 본 좀비 현상 -




1. 좀비가 나타났다.

1-1. 좀비의 기원

좀비는 부두교의 성직자 ‘보코르’가 제례의식을 통해 부활시킨 시체에서 시작되었다. 부두교는 Voodoo 서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로 팔려 온 노예들이 초자연적인 토속 종교를 카톨릭 신앙과 결합시켜 탄생시킨 민간 신앙이다. 다양한 숭배 양식이 존재하며 신성한 마술인 백마술과 사악한 마술인 흑마술이 있는데 좀비는 흑마술을 부리는 주술사가 되살려낸 시체를 가리킨다. 살아난 시체들은 영혼을 상실한 존재로 주술사들은 이들을 노예로 부렸다.

1-2. 대중문화에 등장한 좀비

1929년 미국의 탐험가이자 기자인 윌리엄 시브룩의 소설 <마술섬(Magic Island)>이 좀비를 등장시킨 최초의 문화 콘텐츠로 기록된다. 카리브해 일대에 미신처럼 떠도는 좀비를 영어권에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영화에 좀비가 등장한 것도 비슷한 시기이다. 1932년 벨라 루고시 감독의 <화이트 좀비>에 등장하는 좀비는 부두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좀비의 원형적 개념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의식을 제거당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권력자의 통제를 받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후 1943년 자크 투르뇌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1964년 대 테니의 <좀비>, 1966년 존 길링의 <좀비의 역병>까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좀비는 관심을 가진 소수에 의해 작품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특이한 소재에 머물렀다.

1-3. 하위문화 속 자체적 기틀을 마련한 좀비

좀비 콘텐츠 역사에서 의미있는 작품으로 가장 먼저 손 꼽히는 것은 1968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이 작품은 21세기 들어 많은 감독들에 의해 메이저 영화에서 리메이크 될 만큼 좀비 이야기의 원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원형적 구조의 핵심은 ‘공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침입자가 내부를 붕괴시키고 공포가 해결되지 않는 ‘모던 호러’의 이야기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고전 호러가 괴물이 항상 외부로부터 발생하여 정상성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구조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지 로메로가 성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형은 좀비의 개념을 해결되지 않는 공포로서 재정립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좀비에게는 부두교의 주술사처럼 그들을 좀비로 만든 존재, 좀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마스터가 존재했지만, 로메로의 영화에 와서는 좀비를 만든 존재가 사라진다. 따라서 이 때부터의 좀비는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 생산을 하거나 노동을 하지 않고 오직 증식하고 전염시키며 개체를 늘려가는 좀비의 원형적 개념이 확립된 것이다.

“좀비는 정말로 괴물 세계에서 더 낮은 계급의 시민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좀비 3부작을 만들어낸 조지 로메로의 말이다. 무기력한 특성과 계급적 특질로 인해 좀비는 괴물 가운데 가장 정치적 캐릭터로 해석된다. 조지 로메로의 3부작은 흔히 ‘베트남전’, ‘물질 만능주의’, ‘레이건의 군사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곤 한다.

1-4. 메이저 문화에 수용된 좀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메이저 영화에 많은 좀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니 보일의 <28일 후>,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레지던트 이블> 등이 대표적으로, <새벽의 황당한 저주>, <데드걸>, <좀비 스트리퍼스>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좀비 콘텐츠가 나오기도 했다. 블록버스터 좀비 영화로는 프란시스 로렌스의 <나는 전설이다>, <좀비랜드>등이 있다.

영화 외 매체의 정상급 창작자들이 좀비를 다루기 시작한 것도 메이저 영화가 좀비를 수용한 것과 비슷한 시기이다. 2010년과 2011년 일본 만화 대상에 노미네이트 된 <I am a hero>,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좀비>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윤이형 작가는 <큰 파랑 늑대>라는 소설로 신춘문예에 등단하였고, <오만과 편견>의 좀비 버전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2. 좀비 콘텐츠의 의미와 상징들

2-1. 살아있는 시체

이 아이러니한 표현은 좀비의 상태를 정확하게 드러낸 말이다. 좀비는 먹고 움직이고 자극에 반응한다는 면에서 분명 살아있지만, 현상에 대한 인식이나 관계에 대한 판단이 없다. 가족을 먹이로 인식하고 사람에게 공격당해 쓰러진 동족 좀비도 먹이로 삼는다. 동물이라도 살아있다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공포, 친밀감 등이 형성되지 않으므로 시체라고 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한 존재가 되었을 때, 스스로를, 혹은 그렇게 된 인간을 가리켜 ‘좀비’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비스 찰머스는 현상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인간에 대해 ‘철학적 좀비’라는 개념을 적용했으며, 컴퓨터에서도 시스템 지원은 점유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프로세스를 가리켜 ‘좀비 컴퓨터’라고 한다. 새로 나온 국어사전에서 ‘좀비족’은 대기업이나 방대한 조직체에 묻혀 일을 안해도 그만인 식의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종업원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2-2. 나약한 공포의 존재

대중문화 콘텐츠는 무수한 공포의 존재가 등장해왔다. 그들은 그야말로 공포를 줄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좀비는 나약한 개체이다. 그들은 매우 느리게 비틀거린다. 전력질주 하는 인간을 절대로 쫓아올 수 없고, 인간이 휘두르는 도끼를 피할 수 없다. 콘텐츠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빛을 무서워하기도 하고(나는 전설이다), 물에 닿으면 빨리 썩어(당신의 모든 순간) 비를 무서워하기도 한다. 시력은 거의 없고 소리에 간신히 반응한다.

이 나약한 좀비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살을 먹으므로 끊임없이 그 개체를 더해간다는 것이고, 그들이 떼 지어 움직이면 그 무리에게 포위된 인간이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 무질서의 확산은 어떤 통제 시스템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고 생존을 위해 도망 다니는 인간들은 언젠가 저 끔찍한 존재와 같이 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빠지게 된다.

많은 콘텐츠에서 좀비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결말을 취한다. 좀비는 개체로는 무기력하나 이 땅에 인간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물어뜯어 모두를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고, 그 후엔 서로를 먹다가 자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누구도 승리할 수 없고, 결코 행복한 결말을 기대할 수 없는 좀비의 특질이 좀비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2-3. Reset을 꿈꾸다.

21세기 나타난 좀비 콘텐츠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루저’에 가까운 인간들이다. 그들은 좀비가 나타나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면 즐거워한다. 스스로는 만들 수 없었던 이 시대의 전복을 좀비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이들은 꿈도 미래도 없고, 현실이 너무 싫기에 ‘전복’을 원한다, 그렇다고 스스로 나서서 혁명을 일으키기엔 개인의 힘은 너무나 무력하다. 그러니 원인도 알 수 없고, 정부와 기성 세대가 손 써볼 수 없는 전복이 일어나 준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좀비 콘텐츠에는 무기력하고 짜증나는 청년층이 꿈꾸던 전복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 속의 주인공은 기존의 히어로물이 ‘잘난 한 놈’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다르게 나처럼 작고, 나처럼 무기력하고, 나처럼 스펙이 떨어지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감정이입이 쉽고 그러므로 좀비들을 깨부수며 달려 나가는 주인공이 곧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4. 희망없는 하향 평준화

앞서 말했듯, 살아남을 가능성,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이야기, 그것이 좀비 콘텐츠의 특질이다. 이러한 콘텐츠에 청년층이 열광하는 것은 발전과 성공이라는 키워드에 지쳤다는, 그냥 다 같이 주저앉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사안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좀비가 되면 운이 좀 나쁜 일이긴 하지만 모두가 함께 좀비가 되어 삐걱거리고 걸어 다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나는 아니겠지’라는 근거없는 작은 소망을 품고 하루를 살아갈 뿐, 내일, 모레, 십 년 뒤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청년층의 절망적 미래관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다시 찾고 싶은 희망의 실마리

Y2K의 종말적 세계관이 지닌 공포를 지나 도착한 21세기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극심한 불황과 자연 재해들로 가득하다.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고 터전을 잡은 기성세대조차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지는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이 좀비 콘텐츠와 맞물리며 근 몇 년 간 이 트렌드가 고속 성장을 했다고 분석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헛된 것이건 불안정한 것이건 희망을 품고 싶어 한다. 암울한 세계관의 궁극을 지향하던 좀비 콘텐츠에서 이런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0년 방영된 <워킹데드>는 가족에게서 그 희망을 찾고자 한다. 주인공도 루저가 아니라 가정과 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지방 보안관이다. 주인공 이외에도 무수한 가족, 혹은 유사 가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개인으로서는 완벽하지 않지만 서로의 약점과 결점을 가족의 믿음이 보충해준다는 너무나 이상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어쩐지 좀비 콘텐츠의 껍데기를 입기에는 지나치게 도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워킹데드는 전미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국내 최고 이야기꾼으로 불리우는 강풀 작가는 <당신의 모든 순간>이라는 좀비 웹툰을 통해, ‘사랑’에서 그 해법을 찾고 있다. 사랑의 힘으로 좀비 천국에서 희망을 찾는다. 비록 주인공은 승리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지키는 것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인류는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그것을 타개할 영웅은 없으며 그러므로 희망도 없다. 이러한 비극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꽃피운 21세기 주류 콘텐츠인 좀비물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왜 패배주의에 빠져들었냐는 질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좀비 콘텐츠에서 좀비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다. 그 현실을 부정하거나 질책하는 어른은 신뢰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책임감을 가지고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최선으로 임하는 사람, 젊고 철없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무엇을 갖고 있는 청년들, 자신을 존중해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희생을 전제한 사랑이 있다면 관계성을 잃어버린 좀비들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는, 혹은 보고 싶다는 시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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